빠리에 가보셨나요? 전 어릴때 Parisienne Walkways 라는 연주곡을 너무 좋아했던 적이있었답니다. 물론 지금도제가 손에 꼽는 좋아하는곡이지요.

세운상가 뒷골목 빽판 파는집 근처에서 이 곡의 중간에 읍조리듯한가사가 적힌 브로셔를 발견하곤 한참을 외워본적이 있었는데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PhilLynott 이란 보컬로 예전에 Thin Lizzy 라는 그룹에 있었답니다.

이 목소리에 반해 이 노래에 취해 언제/어디서든 빠리를 연상할 일이 생기면막연하게 "언제든 빠리에 꼭 가봐야쥐"란생각을 되뇌이곤 합니다. 심지어 빵가게 빠리 크라상앞을 지나도..ㅋㅋ

프랑스에 다녀온 친구에게서 말로만 듣던샹젤리제 거리와Mont-Saint-Michel, 그리고 노천 카페...죽기전엔 언젠간 꼭 한번 가보리라 다짐합니다. 멋진 파리지앵들하고 산책길도 걸어보구요.. ^^

그대 맘에 울리는 소리 ...

Parisienne Walkways Lyrics

I remember Paris in ''49
The Champs Elyses
Saint Michel and old Beaujolais wine

And I recall
That you were mine
In those Parisienne days

Looking back at the photographs
Those summer days
Spent outside corner cafes

Oh I could write you paragraphs
About my own Parisienne days


Mont-Saint-Michel (대한항공 선전에 나왔던...그 멋진 성)

2004. 2. 12. 17:22

저는 평소 애국자라고 생각해본적도 없는 사람입니다만..

아래 두 글을 읽고 있으니..참으로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倂合詔書(병합조서)가 나린날 반도민중은 천황폐하의 赤子(적자)요 신민이 된 것입니다. 천황폐하의 말씀에는 추호의 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內鮮(내선)에 차별이 있거니 하는 것은 오직 일본의 국체를 모르는 일부 사람뿐입니다.
그러면 황국신민은 어떤 일을 해야하는가. 황국신민은 이 국토과 제 재산과 자녀와 자신이 생명이 천황폐하의 것, 폐하께서 받자온 것으로 믿습니다. 이것이 일본정신입니다.
그러므로 황국신민에게는 英米人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개인도 없고 자유도 없습니다. 자유가 있다면 오직 천황을 섬기는 자유가 있을 뿐이니 이 자유야말로 가장 귀중한 자유여서 생명으로써 지키는 자유입니다.
황국신민에게는 영미식 자유의 개인이 없고 오직 大御心(대어심)을 體(체)하여서 천황이 하랍시는 일을 순순히 할 따름입니다. 이것을 忠이라고 합니다. 모든 선은 오직 천황께 忠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일본 정신입니다.

이광수 -『신시대』 1942년 1월호

병자호란에 洪·吳·尹 삼학사라는 갸륵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끝까지 청에 항복하지 아니하고 죽었다. 나라와 민족은 그들을 숭앙하여 그들의 자손은 錄用되고 대접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갸륵다 하여 전 국민이 다 三學士 될 수는 없어서, 이백 칠십 년 간 청국의 절제 밑에서 살았다.

- 중략-

「천황에 충성하라」, 「內鮮一體」라 하는 것을 아니 내어 세우고는 이런 일은 못하는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 가령 「우리 조선인의 교육 기관을 세워 다오」할 경우에 언론인이나 공직자는, 「같은 천황의 赤子가 아니냐, 왜 교육에 차별을 두느냐」해야 당시에는 말이 통하였고, 관공직의 조선인에 대한 제한이나 차별 타파를 부르짖는 공식이 「다 같이 천황의 赤子여든, 내선 일체여든, 명치 대제의 뜻이어든 왜 내선 차별을 하느냐」하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예수교인이 「우리 주 예수」를 찾고 불교도들이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선술집 영업 허가를 얻으러 가면, 관헌은 창씨하였느냐, 황국 신민 서사를 불러 보아라 하여, 통하면 좋고 불통이면 하라는 대로 다 해 가지고 다시 가야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상에서 국내에 있으면서 「반민족 행위」를 아니하고 살아 온 사람은 삼학사 같은 지사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하고 가만히 있을 팔자를 가진 이였을 것이니, 그는 아마 민족을 위한 행위도 아니하였을 것이다.
민족 전체를 삼학사의 절개를 표준으로 단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민족에 이로운 일도 아닐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친일파의 처단을 절규하는 이는 그들 자신 청정 무구한 애국자로서 민족 정기의 확립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것이겠지마는, 실제로 그 영향이 미칠 바도 생각할 필요가 있고 또 동포를 안고 우는 인정도 고려하지 아니하고 너무 추상열일(秋霜烈日)로 나가면 민족 화기를 깨뜨릴뿐더러 지사 자신의 덕을 손상함이 없지 아니할까 염려된다. 군중이 간음한 여인을 끌어다가 돌로 때려 죽이자고 큰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하신 예수의 말씀도 한번 참작할 것이 아닐까 한다.
「남이 온전하기를 요구치 말고, 제가 부족한 것을 용서치 말라」고 하였다. 만일 삼학사가 오늘 계시다면 자기의 청결을 자랑하여 불쌍한 동족을 숙청하라고 주장하셨을까.

官公吏는 반민족자였던가

일본 순사보다는 조선인 순사가 낫지 아니하였던가. 「그놈 왜놈보다 더하다」는 악평을 듣던 형사도 일본인보다는 낫지 아니하였던가.
조선인 군수이던 고을에 일본인 군수가 올 때에 백성들은 싫어하지 아니하였던가. 아동들도 조선인 훈도나 교장을 더 좋아하지 아니하였던가. 판검사도 조선인은 조선인에게 인정을 두었다는 것은, 사상 사건을 조선인 판검사에게 아니 맡기는 것을 보아서 알 것이었다. 유치장이나 감옥의 간수도 조선인이 우리에게 사정을 보였다. 다만 그들은 일본인에게 의심받지 아니할 정도에서만 인정을 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불만이었던 것이다.
조선인 학교비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하려고 애쓴 것은 조선인 도·부 회의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려나 나는 지난 사십 년 간의 경험으로 보아서, 조선인 관공리가 일본인보다는 민족에 해를 끼쳤다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그렇다 하면, 조선인 관공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일정하 우리 민족의 실제 생활에 조금이라도 유리하지 아니하였던가.
또 조선인 관공리 치고 「나는 조선 민족을 배반하여서까지라도 일본에 붙으리라」하고 관공리가 된 사람을 상상할 수가 있었을까. 일본인에게 불신임받을 것이 두려워서 가장 충성을 보이고 조선인에게 냉혹한 모양을 보인 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였을까. 더구나 설운 일을 당하기로 하면 우리들 평민들보다도 조선인 관리들이 더하였다고 생각한다. 같은 학력을 가지고도 일본인보다 월급은 적어, 승진은 늦어, 대우는 나빠, 그들은 피눈물 고일 때가 많았으리라고 믿는다. 「그러고 왜 그놈의 종노릇을 해? 차고 나오지 못하고」한다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번 잡은 직업을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참고 오래오래 견디는 동안에 고등관 삼등에 올라 가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등관 삼등이라 하여 특별히 더 죄를 많이 주어야 할 이유는 없고, 도리어 일본인과 경쟁하여서 그렇게 불리한 조건 밑에서 그만큼 올라 갔으니 참을성도 솜씨도 있는 경험 있는 능력자라고 믿을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 하나를 대학 교육을 시키고 고등 문관 시험을 치러서 고등 문관 삼등까지 끌어 올리기에는 수재로도 삼십 사오년의 세월이 걸리는 것이니, 진실로 고귀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친일파의 손으로 지은 쌀이 식량이 될 수 있다면 일정 시대의 사무 능력이 대한 민국의 사무 능력이 아니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디나 악질인 자가 있는 모양으로 일정 시대 관공리 중에도 그런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두 포기 김을 없이 하기 위하여 밭 한 뙈기를 갈아엎을 것인가. 한번 반민족 행위자의 낙인이 찍히면 그는 다시 애국의 일을 못하게 될 것이다. 모모 농학 박사가 일본 시대에 장(長)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 좋은 재주를 썩히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누구의 해인가.

『이광수 전집13권』 중 「나의 고백」중에서

자라는 동안 우리는 이런사실을 한번도 배운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모든걸 잊고살다보면....

어쩌면 우리나 우리의 후손들은 다시 신사 참배를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해야 하지 않을까요?

과거에 대한 인식없인 용서도 없는 법입니다.

2004. 2. 12. 13:23

과거 민족에 대한 반역은그 당시에는 죄값을 치르지 못했다 해도

먼 미래에는 반드시 역사의 이름으로 단죄된다고 믿고 배워왔습니다.

과거를 잊어버린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우리의 위정자들이 말했습니다.

해방이된지 수십년이 지났건만

우리는아직도 과거의 그늘에서 살고 있는것 같습니다.

소위 국민을 대표한다는 자들이그토록 과거의 그늘에 머물고 싶어한다면

이제당신이 일어나 역사를 새로 쓰심이 어떨까요?

이제 진정한 역사의 이름으로 과거 속에 살고 있는그들을 처벌함이 어떨까요?

2004. 2. 10. 09:06

반쯤 비운 5000원짜리 Table Wine 과 200원 짜리 찢어낸 빵 한조각과 500원짜리 오렌지 한개입니다. 언제부터 이 싸구려 와인에 맛이 들렸는지 모르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기묘한 술버릇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 남들이 보믄 주접싸네..라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지만.....

그냥 오늘은허기도 지고...취하고 싶기도 합니다....

2004. 2. 8. 22:07